진료실 창밖으로 산책줄을 단 강아지들이 지나간다. 꼬리를 흔들며 세상의 냄새를 모조리 수집하려는 그들 곁을, 창틀 위 고양이는 눈만 반쯤 뜬 채 지켜본다. 강아지는 무리에 기대어 움직임 속에서 안심을 얻고, 고양이는 익숙한 햇빛 자리에 몸을 말아 평온을 찾는다. 어느 날 문득,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들이 이 둘 중 누구와 더 닮았느냐를 묻는 우리의 태도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닮음이 아니라 다름의 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나는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죠?”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소리는 공격이기보다 구조 요청일 때가 많다. 불규칙한 형광등, 알 수 없는 향, 예기치 않은 접촉 - 새로운 자극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순간, 세계는 그들에게 홍수처럼 넘친다. 우리가 흔히 ‘문제행동’이라 부르는 몸짓은, 침수된 방에서 물을 퍼내려는 동작과 같다. 낯선 마트 대신 익숙한 동선을 고집하고, 예고 없는 변화에 멈춰 서는 일은, 살기 위한 기술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강아지처럼 매일 밖으로 나와 무리에 적응하라”고 요구한다. 교육의 이름으로 더 큰 소음과 더 잦은 접촉을 주입하고, 버티지 못하면 약을 늘린다. 약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극심한 불안과 자해의 고리를 끊어 잠시 숨을 고르게 해주는 약물은 분명하게 제 몫을 한다. 하지만 약이 ‘우리 기준’에 맞추기 위한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치료의 목표는 순응이 아니라 고통의 완화, 그리고 자기 방식의 생활을 회복하는 일이어야 한다.
나는 오늘도 보호자에게 묻는다. “산책이 꼭 필요할까요, 아니면 창가 햇빛이 더 큰 안심일까요?” 예고 가능한 시간표, 소음이 적은 공간, 질감과 향을 선택할 권리, 대화의 속도를 조절할 여유-이런 작고 구체적인 조정들이 자폐적인 삶을 덜 고통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강아지의 리듬을 가르치는 대신, 고양이의 리듬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름을 훈육의 대상으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그들의 세계도 -그리고 우리의 세계도-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한다.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더디게 성장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입니다.
- ‘대기만성’의 유래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이름난 장군이 있었어요. 그에게는 최림(崔林)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는데, 외모도 빈약하고 출세가 늦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죠. 하지만 최염 장군은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하였어요. "큰 종이나 큰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형이다.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라. 그러면 틀림없이 네가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최림은 후일 천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이라는 큰 벼슬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높은 산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 처럼, 성취하기 어렵고 힘든 일들은 내려가는 하락도 힘듭니다.
일본 국내에도 이름으로 성공한 유명한 사례가 있다. 1991년 일본의 최대 사과 생산지로 유명한 아오모리현에 태풍이 불어 닥쳤다. 잘 익어가는 사과는 강력한 태풍으로 인해 대부분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농부들은 망연자실했고, 한 해 농사를 망친 것에 대해 한숨만 내쉬고 있었는데, 사과를 치우던 어느 농부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몇 개의 사과를 발견한다. 그 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농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아직 떨어지지 않는 사과를 잘 포장하여 별명을 붙여 주었다.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는 사과’의 탄생이다. 사과가 판매되는 시기가 대학교 입시 시즌과 맞물리면서 농부의 사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합격 사과'가 되어 불티나게 팔렸다. 태풍으로 인해 일반 사과보다 맛도 덜하고, 모양도 곱지 않았지만 태풍을 견딘 사과였기에 사람들은 기꺼이 비싼 값을 주고 사과를 샀다고 한다. 지금도 ‘합격 사과’는 아오모리현의 명물이 되어 매우 고가로 일본 전국에 판매가 되고 있다. ‘떨어지지 않는 사과’ 즉, ‘합격 사과’라는 이름이 아오모리의 사과 농가를 구제한 셈이다.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농부의 가정에서 출생. 정규교육은 18개월간 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
22살 때 사업에 실패, 23살때 주 의회 선거에 낙선, 25살때 또 사업에 실패.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세번 낙선, 상원의원 선거에도 낙선. 부통령 후보 지명에도 고배.
51살에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 미국 역사가들과 정치평론가들 사이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에 대한 설문조사 때마다 거의 매번 1위에 오르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이력은 가난과 좌절, 실패로 점철돼 있다.
학력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는 링컨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될 때까지 오하이오강의 나룻배 사공에서부터 잡화점의 점원,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의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훗날 링컨은 "겨울에도 팔꿈치가 드러나는 해진 옷을 입었고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낡은 구두를 신었다"고 궁핍했던 젊은 시절을 술회했다.
숱한 선거에서 패했지만 선거 유세중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연설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링컨이 1860년 2월 뉴욕의 엘리트 정치 지도자들의 초청을 받아 연설했을 때 청중들은 깜짝 놀랐다.
서부의 시골뜨기인 링컨의 남루한 옷차림에 뉴욕 상류인사들로 이뤄진 청중들이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연설내용이 이들의 흉중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교통수단이나 미디어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던 19세기 중반, 보잘 것없는 경력의 링컨이 전국적인 유명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것은 빈틈없는 논리로 무장한 토론 실력과 청중을 사로잡는 언변이었다.
1809년 2월12일 일리노이에 인접한 켄터키의 시골 하젠빌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링컨은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고 그의 부모 역시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이런 링컨은 어려서 풍부한 독서를 통해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 이상으로 폭넓고 깊은 지식을 습득했다.
게티즈버그 연설과 대통령 취임사 등 그의 명연설문들은 모두 자신이 직접 쓴 것이다.
링컨탄생 200주년 美전국 추모무드
(하젠빌<美켄터키주>=연합뉴스) 안수훈 특파원 = 오는 12일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미 전역에서 추모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사진은 링컨 대통령이 소년시절을 보낸 노브 크릭 농장 모습. 왼쪽의 작은 집은 당시 오두막집을 재현해 놓은 것. 2009.02.09.ash@yna.co.kr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사업의 실패로 굴절을 겪던 링컨은 23살의 나이로 정계의 문을 두드렸다.
1832년 일리노이 주의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지만 2년 후 주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주의원을 4차례 연임한 후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했지만 숱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846년 하원의원에 당선됐지만 2년 단임에 그치고 고향에서의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전에 뛰어들어 민주당의 거물정치인 스티븐 더글러스와 경쟁을 벌였다.
당시 선거전에서 링컨은 "갈라진 집안은 제대로 설 수가 없다.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州)와 모든 인간의 자유를 신봉하는 주(州)로 갈려 미국 정부가 유지될 수 없다"면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며 7차례 걸쳐 더글러스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된 링컨은 1860년 공화당의 후보 지명을 받아 제16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종전까지는 미국의 모든 대통령은 대륙의회에 참가한 13개주 출신들 일색이었으나 켄터키의 변방 태생이 대통령이 된 것은 링컨이 최초였다.
대통령 당선 직후 노예제 폐지에 반발한 남부 주들의 연방 이탈로 분열의 위기속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링컨은 북부의 여러 세력들을 조정하면서 점진적으로 노예해방을 단행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게티즈버그에서 막대한 전사자가 발생하면서 전세가 한때 위기로 몰리고 북부내에서도 강강.온건파간의 격렬한 대립속에 정치적 파국의 위기를 맞았으나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 묘지에서 행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연설로 단합을 이끌어내고 전세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864년 재선에 성공한 후 이듬해 남북전쟁이 종결되는 상황을 지켜봤으나 남군의 항복 이틀후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남부 출신의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암살당한 링컨은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으로 분열의 상처가 극심했던 미국에서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탄생 200년을 맞은 지금 미국에서 링컨이 여전히 추앙받는 이유는 가난을 딛고 성실과 정직으로 대통령까지 올라 순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 자신의 정적이었던 인물을 내각의 국방장관과 재무장관으로 기용한 링컨은 포용력과 통합의 리더십을 통해 연방의 분열 위기를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 지금의 초강대국 미국의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